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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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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남아메리카 축구 연맹(CONMEBOL)이 주관한 첫 번째 대륙 클럽 축구 대회이다.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7개 팀이 참가했으며, 페루,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는 불참했다. 대회는 조별 예선과 준결승, 결승으로 진행되었으며, 페냐롤이 올림피아를 꺾고 초대 우승을 차지했다. 알베르토 스펜서가 7골로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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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 [국제 축구 대회 정보]에 관한 문서
대회 요약
대회 명칭코파 데 캄페오네스 데 아메리카
연도1960년
다른 명칭해당 없음
기간1960년 4월 19일 - 1960년 6월 19일
참가 팀 수7
참가 협회 수7
우승 팀페냐롤
우승 횟수1회
준우승 팀올림피아
총 경기 수13
총 득점 수39
개인 수상
최다 득점자알베르토 스펜서(7골)
대회 통계
이전 시즌1948
다음 시즌1961

2. 배경

CONMEBOL은 남아메리카의 스포츠를 관장하는 기구로, 1916년에 설립되었지만 설립 후 43년 동안 회원 협회들은 상금 없이 서로 친선 경기만 치렀다. 그러나 1958년, 콘페볼 회장인 호세 라모스 데 프레이타스는 마침내 대륙의 모든 국내 챔피언들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를 시작하여 우승자에게 트로피를 수여하기로 했다.[2] 남미 챔피언십 오브 챔피언스는 이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구체화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2] 모든 국가 협회의 챔피언들이 참가 자격이 있었지만, 브라질의 바이아, 볼리비아의 호르헤 윌스터만, 콜롬비아의 밀리오나리오스, 파라과이올림피아, 우루과이페냐롤, 아르헨티나의 산 로렌소, 칠레의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등 7개 팀만이 참가를 결정했다.[2] 페루베네수엘라는 협회들의 전반적인 무관심으로 인해 각 국가 리그 챔피언을 파견하지 않았고, 에콰도르는 파견할 국가 챔피언이 없었다.[2] 코파 데 캄페오네스의 첫 번째 에디션은 태평양 연안 국가들과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언론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2]

3. 참가 팀

196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는 7개국에서 7개 팀이 참가했다. 각국 축구 협회별로 1개 팀이 참가했다.

협회참가 라운드참가 자격
아르헨티나산 로렌소예선1959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팀
볼리비아호르헤 윌스터만예선1959 캄페오나토 나시오날 데 볼리비아 우승팀
브라질바히아예선1959 타사 브라질 우승팀
칠레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예선1959 나시오날 데 라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팀
콜롬비아밀리오나리오스예선1959 캄페오나토 프로페시오날 우승팀
파라과이올림피아준결승1959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팀
우루과이페냐롤예선1959 캄페오나토 우루과요 데 프리메라 우승팀



에콰도르는 1959년에 전국 챔피언십이 열리지 않아 팀을 보내지 못했다.[2] 페루는 대회 참가 비용 부담을 거부하여 우니베르시타리오가 기권했다.[2] 베네수엘라는 대회에 관심이 없어 데포르티보 에스파뇰이 출전하지 않았다.[2]

4. 대회 형식

각 대결은 2팀으로 구성된 조별 예선으로 진행되었다. 승리 시 2점, 무승부 시 1점, 패배 시 0점이 주어졌다. 홈 앤드 어웨이 경기를 치른 후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팀이 다음 단계로 진출했다. 두 팀이 동점일 경우 득실차를 적용했다. 두 팀이 여전히 동점일 경우 단판 승부를 치렀다. 추첨은 동점을 해결하는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5. 예선

페루의 우니베르시타리오가 추첨 전에 기권하여 대회에 참가하는 팀 수가 홀수가 되면서, 올림피아는 부전승을 얻었다.[3]

산 로렌소와 바이아의 경기는 승점이 동률이었으나 골득실차로 산 로렌소가 준결승에 진출했다. 페냐롤미요나리오스는 각각 호르헤 윌스터만과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를 상대로 큰 점수 차로 승리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몬테비데오에서는 볼리비아 챔피언 호르헤 윌스터만이 대회 역사상 첫 경기를 4일 앞두고 도착하면서 많은 홍보가 이루어졌다. 볼리비아 축구 협회 회장인 발레라 카마라는 경기 시작 9일 전에 몬테비데오에 도착하여 자국 축구 챔피언의 체류를 위한 모든 세부 사항을 준비했다. 그는 또한 볼리비아가 1961년에 개최할 예정이었던(결국 1963년에 개최됨) 남미 선수권 대회를 홍보하고, 1962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볼리비아가 1962년 FIFA 월드컵 개최국인 칠레를 상대로 치를 경기를 확인하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했다. 호르헤 윌스터만의 회장인 파블로 페레즈 에스트라다는 4월 13일에 도착했다.[3]

칠레의 저널 에스타디오 데 칠레의 1972년판은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의 굴욕적인 탈락이 팀의 피로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La U"의 임원들이 칠레 챔피언을 유럽으로 장기간 투어 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고, 그들이 돌아온 후 중앙 아메리카에서 몇 번의 친선 경기를 더 했다고 언급했다. 칠레 언론은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를 "관광객 팀"이라고 비꼬며 비판했다.

5. 1. 1조

경기득점실점골득실승점
산 로렌소210153+22
바이아210135−22



1960년 4월 20일, 산 로렌소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에스타디오 토마스 아돌포 두코 (엘 팔라시오)에서 바이아를 3-0으로 이겼다. 로시가 60분에, 루이스가 81분에, 산필리포가 89분에 페널티킥으로 득점했다. 약 10,000명의 관중이 경기를 관람했고, 우루과이의 에스테반 마리노가 심판을 맡았다.[1]

1960년 5월 3일, 바이아는 살바도르의 에스타지우 옥타비우 망가베이라 (폰치 노바)에서 산 로렌소를 3-2로 이겼다. 카를리토가 11분에, 플라비우가 38분에, 마리투가 89분에 페널티킥으로 득점했다. 산필리포는 9분과 59분에 득점했다. 약 18,000명의 관중이 경기를 관람했고, 파라과이의 에우스타시오 카테베케가 심판을 맡았다.[2]

5. 2. 2조

경기득점실점골득실승점
페냐롤211082+63
호르헤 윌스테르만201128-61



1960년 4월 19일, 페냐롤몬테비데오의 센테나리오 경기장에서 호르헤 윌스테르만을 7-1로 크게 이겼다. 페냐롤의 보르헤스는 13분과 27분에, 스펜서는 35분, 58분, 67분, 90분에, 쿠비야는 20분에 득점했다. 호르헤 윌스테르만에서는 알코세르가 49분에 득점했다. 이 경기는 칠레의 카를로스 로블레스가 주심을 맡았으며, 약 35,000명의 관중이 참석했다.[1]

1960년 4월 30일, 라파스에스타디오 에르난도 실레스에서 열린 호르헤 윌스테르만과 페냐롤의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호르헤 윌스테르만의 레난 로페스는 55분에, 페냐롤쿠비야는 43분에 득점했다. 이 경기는 아르헨티나의 호세 루이스 프라다우데가 주심을 맡았으며, 약 30,000명의 관중이 참석했다.[2]

5. 3. 3조

경기득점실점골득실승점
밀리오나리오스220070+74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200207-70



1960년 5월 8일, 산티아고의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에서 열린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와 밀리오나리오스의 경기에서는 밀리오나리오스가 6 – 0으로 크게 이겼다. 피사로가 4분과 82분에 득점, 클링거가 14분과 68분에 득점, 미첼리가 54분에 득점, 라라즈가 71분에 득점하였다. 약 18,000명의 관중이 경기를 관람하였으며, 우루과이의 후안 카를로스 아르멘탈이 주심을 맡았다.[1]

1960년 5월 15일, 보고타에스타디오 네메시오 카마초 (엘 캄핀)에서 열린 밀리오나리오스와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의 경기에서는 밀리오나리오스가 1 – 0으로 이겼다. 피사로가 48분에 골을 넣었다. 약 25,000명의 관중이 경기를 관람하였으며, 우루과이의 후안 카를로스 아르멘탈이 주심을 맡았다.[2]

6. 준결승전

준결승전에서는 두 경기를 치러 합계 점수가 높은 팀이 결승에 진출했다. A조에서는 페냐롤산로렌소가 두 번의 경기에서 모두 무승부를 기록하여 중립 지역에서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원래 1960년 발디비아 지진 이전에는 칠레가 플레이오프 장소로 지정되었으나, 지진으로 인해 장소가 변경되었다. 페냐롤아순시온에서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것을 원치 않았고, 산로렌소는 100000USD를 받고 페냐롤의 홈구장인 센테나리오에서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것에 동의했다. 결국 페냐롤이 플레이오프에서 2-1로 승리하여 결승에 진출했다.

산필리포는 당시 상황에 대해 "우루과이에서 열린 세 번째 경기에 대한 우리 임원들의 입장에 대해 '나는 그들(산 로렌소 이사회 임원)에게 안 된다고 말했어! 몬테비데오에서 다시 경기하는 것은 사자 굴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였지.'라고 말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또한 첫 번째 골은 운이 좋았고,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결국 경기가 헐값에 넘겨졌다고 주장했다.[3]

B조에서는 올림피아가 미요나리오스를 2차전에서 5-1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6. 1. 준결승 A조

준결승 A조 경기 결과
경기득점실점골득실승점
페냐롤20201102
산 로렌소20201102


  • 1960년 5월 18일, 페냐롤과 산 로렌소의 1차전 경기가 몬테비데오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열렸다. 페냐롤의 리나자가 전반 2분에 득점하였고, 산 로렌소의 보지오가 전반 18분에 득점하여 1-1 무승부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이 경기에는 약 55,000명의 관중이 참여했으며, 칠레의 카를로스 로블레스가 주심을 맡았다.[1]

  • 1960년 5월 24일, 산 로렌소와 페냐롤의 2차전 경기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엘 팔라시오에서 열렸다. 양 팀은 득점 없이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 경기에는 약 15,000명의 관중이 참여했으며, 칠레의 카를로스 로블레스가 주심을 맡았다.[2]

  • 두 팀은 1, 2차전 모두 무승부를 기록하여 1960년 5월 29일에 몬테비데오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플레이오프 경기를 가졌다. 페냐롤의 스펜서가 후반 61분과 89분에 득점하였고, 산 로렌소의 산필리포가 후반 86분에 득점하여 페냐롤이 2-1로 승리하였다. 이 경기에는 약 45,000명의 관중이 참여했으며, 파라과이의 호세 디마스 라로사가 주심을 맡았다.[3]

6. 2. 준결승 B조

팀 1합계팀 21차전2차전
페냐롤1-1산로렌소1-10-0
미요나리오스1-5올림피아0-01-5



경기득점실점골득실승점
올림피아211051+43
미요나리오스201115−41



1960년 5월 29일, 미요나리오스와 올림피아의 경기는 보고타의 네메시오 카마초 스타디움(엘 캄핀)에서 열렸으며, 약 35,000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0-0 무승부로 끝났다.

1960년 6월 5일, 올림피아와 미요나리오스의 경기는 아순시온의 마누엘 페레이라 스타디움(엘 보스케 데 파라 우노)에서 열렸다. 약 35,000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올림피아가 5-1로 승리했다. 올림피아의 돌단은 15분과 88분에 득점했고, 멜가레호는 43분에, 레칼데는 62분에 득점했다. 노리에가는 53분에 자책골을 넣었다. 미요나리오스의 피사로는 70분에 득점했다.

7. 결승전

결승전은 페냐롤올림피아 간에 2차전으로 치러졌으며, 각 참가 클럽의 경기장에서 한 번씩 경기가 열렸다. 1차전은 몬테비데오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열렸으며, 페냐롤은 경기 막판 알베르토 스펜서의 골로 1-0으로 승리했다. 2차전은 아순시온의 에스타디오 마누엘 페레이라에서 열렸다. 올림피아는 경기 대부분을 1-0으로 앞섰지만, 루이스 쿠비야가 경기 종료 6분 전에 동점골을 터뜨려 페냐롤이 대회 첫 번째 에디션에서 우승컵을 차지했다.

경기득점실점골득실승점
페냐롤211021+13
올림피아201112−11


8. 우승

첫 번째 우승


9. 최고 득점자

순위선수
1알베르토 스펜서 페냐롤7
2루벤 피사로 밀요나리오스4
2호세 산필리포 산 로렌소4
3루이스 쿠비야 페냐롤3
4카를로스 보르헤스 페냐롤2
4루이스 돌단 올림피아2
4마리노 클링거 밀요나리오스2
4이폴리토 레칼데 올림피아2


참조

[1] 웹사이트 O Campeão http://www.bolanaare[...] 2010-05-22
[2] 웹사이트 Copa Libertadores de América 1960 http://historiayfutb[...] Historia y Fútbol 2007-09-02
[3] 서적 Yo fui testigo aquel 19 de Abril de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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